제목 |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안중근·신채호·안창호·홍범도…남북, 독립운동가 공통평가-경향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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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04060004…[6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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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우리는 독립운동가입니다 ② ‘남북역사용어공동연구’로 본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 주요 사건 일제의 한반도 강제병합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을 남측에서는 ‘의사(義士)’로 부른다. 북측이 바라보는 그는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애국렬사”다. 표현은 다르지만 남북의 호칭에는 구국을 위한 안중근의 희생정신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남북 최초의 공동 역사서인 <남북역사용어공동연구>(이하 공동연구)에서 주요 독립운동가들을 평가하는 남북의 시각은 다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론·외교독립론·실력양성론 등 다양한 노선 위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지향은 ‘조국 독립’으로 수렴했다. 경향신문은 남북이 <공동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룬 안중근·신채호·안창호·홍범도 등 독립운동가 4인에 대한 기술을 분석했다. <공동연구>는 1919년 3·1운동 이전부터 활동한 초기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남북은 이들 인물의 생애를 서술하고 주요 독립활동을 평가했다. 각자 입장에 따라 강조점과 비판점을 달리하기도 했다. 북측은 무장투쟁론을 높게 평가하며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했다. ■ 안중근 “살신의 항거” “피의 복수” ■ 안중근
남 ‘의사’ 북은 ‘애국렬사’ 호칭 ‘유년시절 무예 능숙’ 공통 서술 이토 사살은 ‘거사’로 같은 표현 남북은 학교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양성을 추구한 안중근(1879~1910)이 무장투쟁론자로 변모해 이토를 사살하기까지 생애를 입체적으로 서술했다. 유년 시절에 대해 남북은 각각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말타기와 사냥을 즐겨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했다”며 무예에 능숙했다고 설명했다. 초기 안중근은 ‘실력양성론자’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주력했다. 안중근이 무장투쟁론으로 나아간 계기로 남북은 1907년 고종 황제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사건을 꼽았다. 이후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했지만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 대해 남측은 “의병을 재기하고자 노력했다”고, 북측은 “자기 몸을 희생하여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되찾을 의지를 굳히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북측은 당시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환영 군중 속에 끼여 역홈에 나간 그는 아침 9시30분경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여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조선민족의 피의 복수를 담아 총탄을 발사하였다.” 북측은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국내외의 의로운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의거를 찬탄했다”고 평가했다. 남북은 공통으로 안중근의 이토 사살을 “거사”로 표현했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 수감돼 재판받는 과정에서 보인 태도에도 남북은 주목했다. 남측은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했다”고 기술했다. 북측은 “려순감옥에 갇힌 속에서도 민족적 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일제 교형리들의 심문에 이또의 15개조 죄목을 렬거하면서 자기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고 했다. 일제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형은 1910년 3월26일 집행됐다. 안중근 생애에 대한 남북 평가에는 모두 “애국심”이란 표현이 들어갔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남측) “안중근의 애국사상에서 기초를 이루는 것은 상무주의, 국민단합, 일제에 대한 고도의 적개심과 열렬한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다.”(북측) 북측은 안중근의 헌신적인 독립운동이 주권회복으로 연결되지 못한 이유를 지도자의 부재에서 찾았다. “조국광복의 력사적 위업을 옳바로 이끌어줄 수 있는 탁월한 령도자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하여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기술했다. ■ 신채호 “실천적 지식인” “민족의 혼” ■ 신채호
무력항쟁 외친 무정부주의자 북측 부정적 평가 전혀 없어 무장투쟁 옹호 역사관 반영된 듯 무력항쟁을 외친 무정부주의자 신채호(1880~1936)는 당초 언론·출판을 통해 주권회복을 도모한 계몽운동가였다. 그는 망국의 그림자가 짙어오던 20대 때 ‘황성신문’ 기자와 ‘대한매일신보’ 주필 등을 역임했다. 당시 활동에 대해 남측은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여 국권회복 의식을 환기하는 많은 글들을 발표했다”고 적었다. 북측은 “인민들의 민족적 각성을 높이고 그들을 반침략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글들을 수많이 발표하였다”고 기록했다. 신채호는 나라가 없어진 1910년 이후 중국·러시아를 오가며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임시의정원(국회)에 참여했는데, 역설적으로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됐다. 그 배경엔 1919년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임정 초대 대통령이다. 남측은 “신채호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비판하면서 의정원직을 사임하고 ‘신대한’을 통해 임정 비판활동을 전개했다”고 기술했다. 북측은 “리승만은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라는 1921년 신채호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했다.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주목한 수단은 ‘무력’과 ‘민중’이었다. 남측은 “신채호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의뢰를 받고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을 제시한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서 의열투쟁 노선을 무정부주의 사상에 의거한 민중 직접 혁명론으로 체계화했다”고 썼다. 북측도 “리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다 같이 현실성 없는 위험한 로선이라고 보았으며 조선민중이 하나가 되여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고 기술했다. 남측과 달리 북측은 의열단과 김원봉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원봉은 1958년 북한에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채호는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다. 남측은 “조선사 연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북측은 역사책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을지문덕전> 등과 문학작품 <꿈하늘> <건륭황제의 꿈> 등을 두고 “자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열렬한 사랑,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투쟁정신, 나라의 독립에 대한 절절한 념원이 반영되여 있다”고 평가했다. 신채호는 56세의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남측은 “항일독립투쟁의 삶으로 일관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한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체계를 확립했다”고 회고했다. 북측은 “감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한몸을 불태워 민족의 혼을 지키고 민족정신을 깨우쳐주려고 하였다”고 기술했다. 북측이 신채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은 없다. 무장투쟁과 민중혁명을 높게 평가하는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북측이 본 안창호 “독립운동의 선배” ■ 안창호
실력양성·계몽운동에 헌신 남북 모두 “독립운동가 통합 시도” 북, 실력양성을 개량주의라 비판 남북은 모두 안창호(1878~1938)를 민족 실력양성과 계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로 봤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민권운동에 힘쓴 그는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 활동을 두고 남북은 각각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지식계몽에 힘썼다” “교포들의 인권보호, 취업알선, 로동조합, 문화계통사업에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안창호는 1907년 국내로 돌아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오산학교 등을 건립했다. 나라를 잃은 뒤에는 미국으로 망명해 1913년 그곳에서 흥사단을 만들었다. 남측은 안창호가 국내외를 오가며 한 독립운동의 사실을 일대기식으로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북측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모습을 특정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부각했다. “(조선)통감 이또 히로부미가 안창호에게 일본의 대조선정책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도산(안창호의 호) 내각’을 세워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애국적인 민족주의운동자로서의 지조를 지켰다”는 식이다. 안창호는 1919년 임정 수립 당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등을 역임했다. 남북은 안창호를 임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통합을 이루려 한 인물로 그렸다. 남측은 “안창호는 임정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하이 소집 등을 실행했다. 1921년 임정이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기술했다. 북측은 “임정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민족운동자들의 단합을 이룩하기 위한 활동을 벌렸다”고 했다. 북측은 안창호가 독립운동계에서 차지한 높은 위상을 강조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자들 속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며 “림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만주의 독립군들도 안창호를 ‘독립운동의 선배’로 불렀다”고 기술했다. 북측은 그가 주창한 실력양성론의 한계도 지적했다. 북측은 “조선민족을 세기적으로 정신적 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견해와 실력양성을 개량주의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려고 한 것 등으로 하여 조선인민의 반일투쟁 의욕을 거세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썼다. 만주 등지에 독립운동 근거지인 이상촌(理想村)을 만들고자 한 시도를 두고는 “비현실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남측은 안창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 홍범도 “일본군 전멸” “식민통치 타격” ■ 홍범도
포수 출신 “독립운동가” “지휘관” 봉오동·청산리 전투 높이 평가 북측 소련과의 합동 작전 등 기술 남북은 대한제국 시기 의병장으로 출발해 독립군 지도자로 활동한 홍범도(1868~1943)를 각각 “독립운동가” “반일의병장이며 독립군 지휘관”으로 설명했다.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를 일일이 나열하며 그의 공적을 높게 평가했다. 포수로 활동하던 홍범도가 의병장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기를 남북 모두 1907년으로 봤다. 그해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며 포수들의 총을 빼앗았다. 이를 계기로 홍범도는 포수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북측은 “홍범도는 지방관리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포수들의 생존권을 지켜 싸웠기 때문에 포수들 속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남북은 홍범도의 전투 성과를 “큰 전과” “큰 승리”로 거듭 강조했다. 남측은 “1919년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뒀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 만포진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해 7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뒀다”고 썼다. 북측도 같은 전투 내용을 언급하며 “일제 식민지 통치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고 썼다. 독립군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가 세운 업적을 남북 모두 상세히 서술했다. “(1920년 6월)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남측), “봉오골 전투에서 일제 침략군 120여명을 소멸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일제 침략군을 수많이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북측)고 했다. 북측은 “봉오골과 청산리에서의 큰 승리는 홍범도의 지략에 의한 결실이었다”고 적었다. 남측과 달리 북측은 홍범도가 소비에트연방(소련)과 관련해 활동한 내용을 기재했다. 북측은 “붉은군대와 함께 일제 침략군과 백파군대를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의 기간에 독립군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다”고 기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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